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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 마누엘 푸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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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누가 되고 싶어? 이레나야, 아니면 설계사인 여자동료야?”
“이 멍청이야, 당연히 이레나가 되고 싶지. 여자 주인공이거든. 난 항상 내가 여주인공과 같다고 생각해.”
“계속 말해 봐”
“발렌틴, 넌 누구와 같다고 생각하니? 그 청년이 머저리 같아서 헷갈리고 있지?”
“그래, 실컷 비웃어도 좋아. 하지만 난 정신과 의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이건 신소리가 아니야. 난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고 네 선택을 존중했어…… 영화 이야기나 계속해” p.40


“미안해”
“……”
“정말, 미안해. 네가 그렇게 화낼 줄은 몰랐어”
“넌 믿지 않겠지만…… 내가 이렇게 화낸 것은 나치 선전물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하지만 난 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기에 좋아하는 거야. 그런 것과는 별개로 이건 하나의 예술 작품이야. 넌 잘 모르겠지만…… 네가 직접 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너 미쳤어? 그런 것 때문에 울다니”
“난…… 난…… 난 울 거야. 울고 싶단 말이야”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미안해”
“너 때문에 운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그건 바로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서…… 그와 함께 있고 싶고, 이런 모든 걸 그에게 말하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걸 말이야. 너랑 함께 있는 대신 말이야. 난 오늘 하루 종일 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오늘은 내가 그를 알게 된 지 만으로 3년이 되는 날이야. 그래서…… 우는 거야” p.82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얼굴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왜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가까이에 두고 싶고, 어루만지고 싶으며, 키스도 하고 싶을까? 잘생긴 얼굴이란 코가 작아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큰 코도 매력적일 때가 있다. 그리고 눈은 커야 된다. 그러나 작은 눈도 미소를 띠고 있으면 상관없다. 작지만 다정한 눈이어야 한다…… 이마에서 시작된 흉터는 한쪽 눈썹을 거쳐 속눈썹을 지나면서, 코를 스쳐 반대편 뺨까지 깊숙이 새겨져 있다. 흉터가 새겨진 얼굴, 소름 끼치는 시선, 악의에 찬 눈빛. 그는 철학 책을 읽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섬뜩한 시선을 던졌다. 남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는 건 얼마나 못된 짓인가! 하지만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것과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것이 더 나쁜 것일까? 엄마는 날 한번도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난 미성년자와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8년 형을 언도 받았다. 하지만 엄마는 날 무서운 눈으로 쳐다본 적이 없다. p.143


유럽 여자, 똑똑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교양 있는 여자, 국제정치에 관해 지식이 있는 여자, 마르크스주의를 아는 여자,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여자, 예리한 질문으로 남자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여자, 청렴 결백한 여자, 고상한 취미를 가진 여자, 경우에 맞게 옷을 우아하게 입는 여자, 젊지만 동시에 성숙한 여자, 술 문화를 잘 아는 여자, 적절한 요리를 선택할 줄 아는 여자, 경우에 맞게 포도주를 주문할 줄 아는 여자, 자기 집에서 손님을 접대할 줄 아는 여자, 하인을 부릴 줄 아는 여자, 백 명 정도 초대한 파티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여자, 침착하고 다정한 여자, 욕망을 자극하는 여자,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유럽 여자, 라틴 아메리카 혁명가를 높이 평가하는 유럽 여자, 하지만 식민화된 라틴 아메리카 구가들의 문제보다 파리의 시내 교통을 더 걱정하는 여자, 매력적인 여자, 누가 죽었다는 소식 앞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여자, 사랑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전보를 여러 시간 감춰두는 여자, 커피 농장이 있는 정글로 돌아가는 자기의 젊은 연인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는 여자, 파리에서 편집장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여자, 진정한 사람을 좀처럼 잊지 못하는 여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여자, 자기의 결정을 좀처럼 후회하지 않는 여자, 위험한 여자, 모든 것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여자, 괴로운 추억을 잊을 수 있는 여자, 조국으로 돌아간 청년의 죽음까지도 잊을 수 있는 여자, 자기 조국으로 날아가는 청년, 비행기에서 조국의 푸른 산을 지켜보는 청년,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청년……(…) 자기의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해주는 처녀, 어떻게 전 농장관리인이 그녀가 사춘기가 되자마자 강간을 했는지 말하는 처녀, 전 농장관리인이 지금은 정부의 고위직에 올라갔는가를 말하는 처녀, 전 농장관리인이 청년 아버지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처녀, 아마도 이런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사람은 청년의 어머니일 것이라고 감히 말하는 처녀, 청년에게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처녀, 청년의 어머니가 전 농장관리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본 처녀, 오르가슴에 도달한 후에도 애무를 해 줄 마음이 생기지 않는 처녀, 청년에게 뺨을 얻어맞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고 욕을 먹는 처녀, 몸을 주고도 버림받는 처녀, 실인자의 피가 흐르는 잔인한 주인에게 착취당한 처녀.
“큰 소리로 잠꼬대하고 있었어” p.169-175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야. 알겠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무인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아마도 여러 해 동안 둘이서 외롭게 지내야만 하는 무인도 말이야. 감방 바깥에는 우리는 억누르는 사람들이 있어. 하지만 이 안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여기에는 누가 누구를 억압할 수 없어. 단지 있는 것이라고는 지쳐 있는, 아니 뒤틀려버린 내 마음을 괴롭히는…… 어느 한 사람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날 잘 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야” p.268


“발렌틴……”
“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비웃지 마”
“말해 봐”
“네가 내 침대로 올 때마다…… 그러고 나서 일단 잠이 들면, 난 더 이상 이 잠을 깨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해. 물론 홀로 계실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하지만 나 혼자만 생각한다면, 난 잠을 깨고 싶지 않아. 이건 내 머릿속에서만 생각했다가 지나가는 그런 것이 아니야. 정말 내 유일한 소원은 죽는 거야” p.311


“그래. 그리고 나도 살아 있어…… 그런데 내 삶은 언제부터 시작하지? 언제가 되어야 내가 내 것을 만질 수 있고, 내 것을 가질 수 있지?” p.335


“난 표범여인이 아니야”
“그래 맞아, 넌 표범여인이 아니야”
“표범여인이 된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야. 아무도 그녀에게 키스를 할 수가 없으니까. 아무도.”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아주 멋진 말인데! 그 말, 정말 맘에 들어”
“……” p.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