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오래된 여러 신앙들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기록하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것이 천상이나 명부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거기 담긴 나의 지난 사년은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 같은 무엇이었을 것이다. 살고 싶어하는 몸. 움푹 찔리고 베이는 몸. 뿌리치고 껴안고 매달리는 몸. 무릎 꿇는 몸. 애원하는 몸. 피인지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나오는 몸. p.8-9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p.25
짐작과 다르게 인선은 카메라를 가지러 되돌아오지 않았다. 어깨와 날개뼈의 깡마른 윤곽이 드러나는 얇은 목 폴라 바람으로, 색이 옅은 청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꼼짝 않고 서 있었을 뿐이다. 택시 한 대가 다시 지나갔고, 전조등이 비추는 허공으로 소금 가루 같은 눈발이 흩어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잊은 사람 같았다. 먹다 만 국수를. 일행인 나를.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이윽고 식당으로 들어온 그녀의 머리에 쌓인 약간의 눈이, 우리 탁자까지 걸어오는 짧은 동안 녹아 자잘한 물방울로 맺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p.42
턱이 떨린다. 이가 부딪히며 딱, 딱 소리가 난다. 잇새에 혀를 넣으면 베일 것 같다. 젖은 눈꺼풀을 밀어올려 나는 어둠을 본다. 눈을 감았을 때와 똑같은 어둠이다.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눈동자로 떨어져 나는 눈을 깜박인다. p.68
그 소원이 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p.114
이제 닿은 건가,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더 깊게 입을 벌린 해연의 가장자리,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인가. p.167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긎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p.179